[헤럴드POP=성선해 기자] 앞이 훤히 보이는 드라마는 재미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배우 김재욱(33)은 반전 그 자체다. 알면 알수록 새롭고 궁금하다.
19일 개봉한 영화 '다른 길이 있다' (감독 조창호/배급 영화사 몸, 무브먼트)는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 삶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기로 한 두 남녀의 아프지만 아름다운 여정을 그린 영화다. 사는 게 지옥인 경찰 수완(김재욱)과 이벤트 도우미 정원(서예지)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동반자살이란 소재에 한겨울 감성을 얹은 시도는 파격적이다. 못지않게 인상적인 건 바로 김재욱이다.
영상이나 사진 속의 김재욱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실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매력은 배가 된다. 세련되고 예민한 인상의 그는 인터뷰어로서는 긴장되는 상대다. 하지만 그 뒤에는 농담과 장난을 좋아하는 기질, 상대방을 배려하는 섬세함이 숨어있다. 생각보다 훨씬 밝고 유쾌하다. 실없는 말 한마디에 웃음을 터뜨리고, 너스레를 즐기는 의외의 면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적확한 단어를 골라 표현하는 스마트함까지 지녔다. '달변인 것 같다'는 말에 곰곰히 생각하던 그는 "군대에서 읽은 책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입대할 때 2년 동안 꼭 해야 되는 일을 목록으로 작성했다. 그중에 하나가 '책을 100권 이상 보자'였다. 덕분에 이런저런 핑계로 안 읽던 책을 실컷 봤지. 근데 전역을 하니까 손이 안 가더라.(웃음) 최근에서야 다시 손에 책을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듣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라고 말하는 김재욱. 하지만 워낙 표현을 안 하는 탓에 삶의 굴곡이 없는 사람 같다는 오해도 받는다고. 배우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는 "안 그래도 이미지가 확고한 편인데, 가만있으면 그런 사람으로 치부가 되는구나 싶더라. 나 역시 인생의 평지풍파가 많았다. 왜 없었겠나"라며 웃었다. 그래도 구구절절한 말보단 연기로 선입견을 깨겠다는 각오다.
그런 김재욱의 앞에 나타난 게 '다른 길이 있다'의 수완이다. 상처투성이의 나약한 남자는 경찰제복 안에 자신을 숨기고 산다. 하지만 결국 삶의 무게와 부조리를 견디지 못해 삶의 마지막을 택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죽음의 동반자로 정원을 만난다. 두 남녀의 비극은 새하얀 설원 위를 질주한다.
"수완은 기본적으로 정원보단 약한 것 같다. 조창호 감독과 가장 먼저 이야기를 나눈 지점이다. 근데 그 나약함과는 정반대로 직업은 경찰이다. 실제 생활에서도 사건이 터지면 범인에 대해 동네 주민들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라고 하지 않나. 그런 걸 많이 봐왔다. 수완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서 보이는 현실감이 마음에 들었다."
삶의 끝자락에 선 남자가 되기 위해 김재욱은 디테일에 공을 들였다. 기본적으로 '다른 길이 있다'는 대사가 많지 않다. 인물들은 표정과 분위기로 더 많은 말을 건넨다. 김재욱은 "애티튜드만 봐도 그 사람이 보이는 순간이 있다. 수완이 서 있는 자세나 말투로 그걸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했다. 대사를 줄이고 그 자리에 인물의 표정과 동선이 자리한 이유다.
"수정 작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나를 의심했다. 점점 확신이 없어지더라. 배우의 입장에서 '컷' 했을 때 '오케이' '정말 좋았어'가 안 나오면 당연히 자존감이 떨어진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과정조차도 수완을 만드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김재욱은 MBC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2002)로 데뷔했다. 올해 나이 만 서른셋. 비슷한 또래와 비교하며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법도 하다. 하지만 그에게선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셀링 포인트나 다름없던 꽃미남 이미지가 아닌, 낯선 얼굴을 들고 나왔다. 일종의 도박인 셈이다.
"결과에 대한 확신을 갖고 일한 적은 없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실 욕심도 크게 없었다. 한창 드라마를 촬영하던 20대 때는 한류가 붐이었다. 일본 쪽 자금이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나도 바보가 아니니 '이런 건 그쪽에서 좋아하겠다'란 계산도 섰었다. 그래도 그걸 노리진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보다 좀 더 유명해졌을 수도 있겠지.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내 선택은 똑같다. 바로 지금이 과거의 내가 바라던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