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덕셔니스트 by Alexikakos
최근 썩 괜찮은 영화를 두 편을 보았다. 하정우 주연의 <허삼관>과 산드라 블록 주연의 <블라인드 사이드(Blind Side)>. 두 영화는 각각 부성애, 모성애라는 연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유명 중화 소설 ‘허삼관매혈기(許三觀賣血記)’를 각색한 영화 <허삼관>에서 주인공 허삼관은 가장 아끼던 첫째 아들 일락이가 자신의 씨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동네사람들로부터 ‘종달새의 왕’이라 놀림 받는다. 뻐꾸기라는 새는 자신의 알을 종달새 둥지에다 낳는 습성이 있는데,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종달새는 다 자랄 때까지 제 자식인줄로만 알고 뻐꾸기 새끼를 기른다는 것에 비견하여 허삼관을 비웃는 것.
절망하는 허삼관은 일락에게 막대하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기른 정이 더 커 결국 일락이를 받아들인 다는 다소 상투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는 마이클 오어라는 미식축구 스타의 청소년기를 다룬 실화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집도, 가족도, 친구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부랑아 마이클 오어를 지역유지인 튜오이 부부가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같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다룬 줄거리다.
두 이야기 모두 가슴 따뜻한 이야기지만, 혹자는 필자에게 이렇게 따질지도 모른다.
“진화론자들의 시각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요. 자신의 유전자도 아닌 자식에게 사랑과 애정, 즉 세덕셔니스트들이 말하는 ‘투자’를 기울인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득볼게 없는 일 아닙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은 진화론적 경제성의 원칙에 부합한다고 주장하는 당신들이 틀렸다는 증거네요.”
그럴까?
문득 예전 일이 하나 떠오른다.
# 2007년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Imperial College)에서 이론물리학 공부를 마치고, 런던대학(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자연과학철학사 석사 과정을 시작했던 필자는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왕립학회(Royal Society)에서 진행된 한 모임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해당 모임에선 과학자들의 도덕적 책임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다. <코펜하겐>(2002년 하워드 데이비스 감독)이라는 영화를 원작자인 마이클 프레인(Michael Frayn)을 포함한 여러 학계의 유명인사들을 모시고 함께 관람한 후 소감을 서로 발표해 보는 식이었다.
이 영화는 1941년에 있었던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사이의 실제 있었던 만남을 각색한 마이클 프레인의 동명연극을 영국의 국영방송인 BBC가 영화화한 작품이었다. 스테픈 레아(Stephen Rea),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등 꽤 대단한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는데,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썩 괜찮은 영화였다.
스승과 제자이자 각별한 친구 사이기도 했던 두 명의 천재 물리학자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1941년 코펜하겐에서 있었던 만남 이후 어쩐 일인지 영영 멀어지게 되었다. 이 둘은 당시의 만남에 대하여 서로 다른 시각의 애매한 기록을 남겼고,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있었는지 그 누구에게도 명확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특히 이후 닐스 보어는 당시 만남의 회상에 대해 경기(驚氣)에 가까운 거부반응을 일으켰는데, 이 만남이 있고 3년 후 닐스 보어가 맨하탄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는 사실만이 당시 만남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대충 짐작만 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영화는 이를 하이젠베르크의 독일인으로서의 애국심, 물리학자로서의 호기심과 양심 간의 내적 갈등, 그리고 조국을 침탈당한 보어가 느끼는 제자이자 친구에 대한 애증과의 외적 갈등으로 풀어낸다. 영화에서 하이젠베르크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직감하고, 그 두려움에 우라늄 235의 분열공식 계산을 망설이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아무튼 세미나는 두 과학자의 양심에 의해서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다는 가정을 기본으로 과학자의 양심이 호기심이라는 과학의 기본 전제에 앞서야 하냐는 화두를 주제로 하고 있었다. 다소 쓸데없이 모두들 진지하던 세미나에, 재미있는 일은 한 순진해 보이는 여학생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왜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질 때마다 핵무기 같은 끔찍한 것들도 같이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의 과학자들의 책임일까요? 그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중2병인가? 최소 대학생은 되었을 텐데 왕립학회씩이나 와서 이 무슨 유치한 질문인지, 원.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졌다. 영화의 원작인 연극 코펜하겐의 작가 마이클 프레인 씨가 그걸 또 진지하게 답변해준 것이다.
“글쎄요,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도 합니다.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의해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살아남기 위해 경쟁해야 해요. 인간도 남보단 자신의 유전자를 더 퍼뜨리기 위해 가까운 사람들끼리 집단을 형성해서 경쟁하려 하는 것이죠. 필요하다면 경쟁자를 직접 없애려고도 하고요. 그건 우리의 본능이에요. 어쩔 수 없는 것이죠. 그것을 이기려면 문명 이상의 산물인 이성으로 본능을 이겨내고 억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형적인 교양과학을 조금 공부한 인문학도의 이해 수준의 답변이었다. 수준 낮은 질문에 수준 낮은 답변이라니. 하긴 리차드 도킨스조차도 젊은 날엔 ‘이기적 유전자’의 초판 말미에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를 타고 났으므로 이타적 삶을 살기 위해서 각자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라는 스스로의 이론에 대한 이해조차 떨어뜨리는 에필로그를 남겼다가 나중에 수정하며 실수를 인정한 바 있다. 유전자의 단위와 인간의 자아 단위를 직접 동일화시키는 것은 크나큰 오류인 것이다.
빤한 답변에 살짝 실망하고 있는데 프레인 씨 뒤에 앉아있던 한 여교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다른 답변을 들을 수 있으려나? 아니나 다를까 사회자가 그것을 발견한다.
“교수님께선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 보군요. 고개를 계속 젓고 계시는 점을 눈치 못 챌 수가 없었는데요, 한 마디 들어볼 수 있을까요?”
여교수가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프레인 씨는 인간의 본성은 경쟁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생물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네요. 인간은 이타적인 모습을 훨씬 더 많이 보여줍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군인들,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의사들, 강아지를 기르는 어린이들 등, 인간의 사랑에 대한 증거는 무수히 많지요. 인간은 이타적인 생명이고 그래서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경쟁이라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세상에! 고작 이게 왕립학회 교수의 수준이라고? 수준 낮은 질문, 수준 낮은 답변, 수준 낮은 지적... 그런데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민망할 마이클 프레인조차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짓궂은 꼴통 본능이 솟아오른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손을 들고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예제들은 인간의 이타성의 증거로 들기엔 조금 부적합하지 않나 하는데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이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어떻게 다른지요? 또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군인들의 예도 가족단위의 친족사랑이 확대된 개념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적군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군인들이 있어야 진정한 이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들은 그냥 자신들 돈을 벌기 위한 직업에 최선을 다할 뿐이고요, 강아지를 돌보는데 애쓰는 어린이들... 그게 정말 이타성이라면 보기 흉한 뱀이나 하이에나를 돌보기 위해 애쓰는 아이들도 같은 비율로 있어야겠지요. 자기 보기 좋으라고 강아지들의 성장을 억제하고 야생성을 박탈하는 애완용 개 사육이 정녕 이타성이라고는 전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런 것 말고 진짜 이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이타성의 예론 무엇이 있을까요?”
그냥 짜증이 났던 나는 교수를 골탕 먹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교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변했다.
“음... 예수님이 있지 않을까요?”
아! 네, 아무렴요.
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지기 전에 사회자는 서둘러 Q&A를 정리했다.
2007년 그날 저녁에 겪었던 일처럼, 리차드 도킨스 자신도 실수를 저질렀던 것처럼, 인간의 이타성과 이기성에 대한 개념은 학식 높은 생물학자들조차 혼동하기 쉬운 개념이다.
진화심리학에 대해 얕게 공부한 사람은 진화심리학이 인간의 모든 감정을 스스로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이기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해석한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이기성의 범주는 결코 객체 단위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리차드 도킨스는 이를 유전자의 단위로 설명했는데, 이기성이 유전자 단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부분의 모순처럼 보이는 현상은 해석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객체단위에서의 진화심리학으로 보면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할 자식을 길러내기 위한 당연한 장치로써 쉽게 이해되지만, 자신의 유전자가 섞이지 않은 자식을 부양하는 허삼관이나 리앤 튜오이 같은 경우는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불쌍한 이들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유전자’나 ‘나와 오랫동안 함께한 이를 아끼는 유전자’의 실력행사로 이해하면 설명이 쉽다. 불쌍한 이들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유전자가 많이 퍼진 부족에서는 도태되는 자 없이 서로가 서로의 생존을 도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그만큼 해당 유전자가 도태되지 않고 스스로를 복제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게 ‘함께한 이에 대한 정’, 즉 ‘시간적 투자’ 개념이 없다면, 인간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리고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고 싶어 하는 욕구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이라도 서로를 아끼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을 무리 짓게 만들고 상호간의 생존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즉, 객체의 이타성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자기 복제 욕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심지어 인간끼리가 아닌 타종 간에도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다. 집에서 기를 애견들만 봐도 성격이 각자 다른데, 게 중에는 인간을 잘 따르는 유전자도, 따르지 않는 유전자도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종에 따라 해당 유전자들의 분포도는 다르겠지만, 다양한 유전자가 자연에 의해 걸러지며 자연스레 적합한 조합으로 각자 복제되어 가는 것임에는 예외가 없다.
물론 그래도 자기 자신의 유전자의 번식을 찾는 것이 우선이기에 ‘부성의 불확실성’ 원리에 의해 허삼관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남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에게 성적 매력을 상실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일단은 모든 아이들을 귀엽게 여기고 돌보고 싶어 하는 것이 꽤나 보편적인 인간의 유전자라고 할 수 있겠다.
뻐꾸기 새끼를 기른 종달새 어미? 전혀 모순이 아니다. 남의 새끼조차 기를 수 있게 하는 애정 어린 유전자의 복제가 있었기에 친자식에 대한 애정 어린 양육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Alexikakos 자칭 최후의 피타고라스 학파. 조용하고 남들과 어울리지 못해 어색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십여 년간의 영국 유학을 통해 픽업 기술을 익힌 국내 1세대 픽업아티스트(PUA).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세계 20대 PUA 후보군에 들기도 했다. 이론물리학자, 음악가, 컨설턴트, 통번역가, 작가, 모 유력 정치인의 정책 보좌관 등 다채로운 이력을 가지고 있다. **Seductionist 유혹이라는 뜻의 Seduction이란 단어에 ist라는 접미사를 붙인 저자의 신조어. 굳이 한역하자면 '유혹 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