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안태현 기자] 시대를 통과하는 모든 상처들에 또 다른 상처가 위로를 던진다.
얼어붙은 한강의 표면이 뚝뚝 잠을 깨는 순간에 귀를 기울이던 두 소녀가 있었다.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고, 언제나 따뜻할 것만 같은 순간들이 햇살처럼 그들을 감쌌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두 소녀는 함께여서 행복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한 소녀는 혼자 남아, 둘이 함께 했던 옛 추억을 기억한다. 얼굴에 가득했던 생기는 잃었고, 무미건조한 현실을 그저 관망하듯이 쳐다본다. 눈망울 가득했던 희망도 온 데 간 데 없다. 기억 속 함께한 소녀는 있지만 소녀는 이제 중년의 여성이 되어 있다.
영화 ‘누에치던 방’은 이처럼 과거의 밝음을 잃어버린 현실의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도시는 삭막하고, 그 속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 가지고 있었던 꿈과 로망은 내버려두고 그저 살아가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과거의 나는 없고 지금의 나만 존재한다. 미래의 나가 있을 지는 미지수다. 희망 따위는 사치일 뿐이고, 그저 지금 당장 살아갈 수 있을 지를 걱정해야하는 삶. 그 속에서 ‘누에치던 방’ 속의 인물들은 제각각의 상처들을 마음속에 켜켜이 쌓아놓는다.
‘누에치던 방’에서 가장 중심 되는 상처의 이미지는 단절이다. 과거와 현실의 단절, 관계의 단절, 자아와 나 자신의 단절, 공간의 단절 등, ‘누에치던 방’은 여러 중첩된 이미지들을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온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채미희(이상희 분)다. 자기의 뜻이 아닌 부모님의 뜻으로 10년째 고시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 채미희는 또다시 시험에서 떨어진다. 이제 돌이킬 수도 없다는 생각에 포기도 못하고 있을 때, 남자친구인 오두민(이선호 분)은 채미희에게 이별을 고한다. 갑작스럽다고 하지만 두민에게는 “갑작스럽지 않다.”
그렇게 방황하던 채미희는 어느 날 지하철에서 마주친 여학생(김새벽 분)을 뒤따르던 중 조성숙(홍승이 분)을 만나게 된다. 채미희는 다짜고짜 조성숙에게 자신이 오래전 헤어진 조성숙의 단짝 친구라고 주장한다. 조성숙은 채미희가 단짝 친구가 아닌 것을 알지만, 그녀를 통해 자신의 오랜 친구 김유영(김새벽 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이 과정에서 관계들은 복잡하게 얽혀 들어간다. 하지만 복잡한 관계 속에서 채미희와 조성숙은 서로가 가진 상처를 서로를 통해 치유하게 되는 오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누에치던 방’을 희망적인 영화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분명 인물들은 이룬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하고 잃어버리기만 하는 인물 역시도 등장한다. 너무나도 차갑고 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렇기에 ‘누에치던 방’은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다. 인물들의 사적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미지로 남지 않고 시대의 모습으로 투영된다. 여기서 ‘누에치던 방’은 공간이 가지는 특성을 가지고 들어와 효과적으로 영화 속 의미 구성에 녹여낸다.
바로 그 공간으로 이용되는 것이 잠실이다.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잠실의 사전적 의미는 ‘누에를 치던 방’이다. 과거 뽕나무 밭이 가득했던 지역적 특색이 녹아든 이름이다. ‘누에치던 방’의 제목 역시 이 잠실에서 출발한다. 영제가 ‘Jamsil(잠실)’이라는 점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낸다. 이러한 제목을 지은 것에 대해 이완민 감독은 “첫 번째로는 전 단계의 의미를 말하고 싶었다. 많이 이야기하는 나비나 나방이 된다는 의미에서 전 단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며 “또 잠실이라는 지역이 가지는 특수성, 예전은 뽕밭이었는데 지금은 아파트와 주공으로 바뀐 환경의 삭막한 분위기를 쉽게 표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얘기했다.
과거와 현재의 단절이 주는 이미지와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연결의 이미지, 이 상충되는 의미들이 담긴 공간. 결국 ‘누에치던 방’은 잠실의 이미지를 대한민국의 현실로 확장시켜나가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개인들이 가진 상처를 이야기한다. 또 그 안에서 개인들이 서로 일종의 연대를 만들어나가며 그 상처들을 치유하고, 단절을 극복해나갈 때의 의미까지. ‘누에치던 방’은 2018년을 통과하는 시대의 인물들에게 가장 적절한 이야기를 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 2016년에 제작된 영화의 감정이 2018년인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다소 씁쓸함을 남긴다.
현실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꼭 그것을 희망적이게 그리기보다 더 상처 가득하게 그리는 것. 영화 ‘누에치던 방’은 차갑게 다가와 따뜻하게 감싸는 실처럼 개인과 개인을 넘어 시대와 시대, 시대와 개인 등 단절된 모든 상처들을 봉합한다. 또한 여기에 이상희, 홍승이, 김새벽, 이주영, 이선호, 임형국 등의 연기가 더해지면서 영화의 깊이 또한 더욱 진해진다.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일말의 위로의 순간을 받아가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이상희의 바람이 과연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누에치던 방’ 오는 31일 개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