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성선해 기자] 흔히 오가는 농담 중 범하기 쉬운 실수가 있다. 웃음을 위해 남을 깎아내리는 것. 아무렇지 않은 척 하하호호 웃어넘기지만 뒷맛은 어째 씁쓸하다. 그 대상이 나 혹은 당신이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그런데 최근 누구도 다치지 않고 관객을 웃기는데 성공한 영화가 있다. 멀미 소녀의 유쾌한 경보 도전기 '걷기왕'이다.
영화 '걷기왕'(감독 백승화/제작 인디스토리)은 선천적 멀미 증후군 여고생 만복(심은경)이 자신의 삶에 울린 경보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지난 20일 개봉한 '걷기왕'은 총 제작비 5억여 원의 저예산 영화로, 25회차로 한 달 남짓 촬영했다. 하지만 개봉한지 10여일이 지났음에도 계속 관객이 들면서 어느새 누적관객 수 8만 4천 명을 돌파했다.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걷기왕'은 요즘 충무로에서는 보기 드문 몇 가지 미덕을 갖춘 영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스포츠 영화의 공식 탈피다. '걷기왕'은 주인공 만복이 멀미 때문에 그 어떤 교통수단도 탈 수 없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그런 그의 눈에 띈 건 경보.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가능한 이 스포츠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소녀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럴듯한 선수복을 입고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맨 만복. 아마도 관객이 그에게 기대하는 건 밤낮 가리지 않는 노력과 치열함일 것이다. 그런데 만복은 경보를 하면서도 천하태평이다. 이를 악물고 뛰는 그의 선배 수지(박주희)와는 달리 만복은 싱글싱글 웃으며 트랙을 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했던 기존 스포츠 영화의 전개를 기대했다면, 만복은 그 예상을 보란 듯이 벗어나버린다.
'걷기왕'은 만복을 통해 패기와 열정, 간절함을 요구하는 기성세대에게 반문한다.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온다는데. 그래서 그날은 대체 언제 온다는 걸까. 엉덩이에 종기가 나도록 앉아서 책장을 넘겨서 대학에 왔더니 또 앉아만 있으란다. 이 좋은 청춘 다 바쳐 열심히 참고 견뎠더니 웬걸, 손에 남은 건 남들 다 가지고 있는 졸업장에 학자금 대출 명세서다. '여기까지만 달리면 돼'라고 해서 숨참고 열심히 뛰었다. 근데 남들 다 한다는 밥벌이와 사람 구실, 나 너 우리에겐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그렇게 끝없는 경쟁의 레일 위를 달려온 세대에겐 '걷기왕'이 날리는 일갈이 참 속 시원할 테다. 만복은 담임(김새벽)의 손에 이끌려 돌고 도는 무한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다. 그의 선택은 누군가에게는 실패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복에겐 선택지에 있는 답안 중 하나였다. 근사한 꿈이 없고, 적당히 한다고 해서 그가 루저로 불릴 이유는 없으니까.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다. 미끄러져도 좋다. 만복은 단지 만복 자신일 뿐이다.
이렇듯 '걷기왕'은 관객의 예상을 깬 영화다.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주인공의 고군분투기가 없다니. 그렇다면 이 영화의 재미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바로 웃음이다.
'걷기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농담으로 점철된 작품이다. 장르를 코미디로 규정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왜 뛰어야 하는 건데?'라고 묻긴 하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은 꽤나 귀엽다.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그걸 지루하지 않게 풀어낸 영리함 역시 이 영화의 미덕이다. 이는 등장인물의 확실한 정체성 때문에 더욱 극대화 된다.
사실 '걷기왕'은 꽤 훌륭한 캐릭터 무비이기도 하다. 주인공 멀미소녀 만복부터 시작해서 자기 계발서 마니아 그의 담임, 본업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육상부 코치(허정도)와 육상보다 청소가 더 좋은 육상부원 정돈(안승균), 공무원이 꿈인 만복의 친구 지현(윤지원), 슬플 땐 힙합을 춘다는 배달부 효길(이재진)까지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쯤 빠져 있다. 빠릿빠릿함과는 거리가 멀다. '수파르타'로 불리는 수지가 그나마 정상인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이 허술한 인물들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진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원하는 걸 찾아나간다. 개성 강한 인물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내는 시너지는 '걷기왕'의 주요 관람 포인트 중 하나다.
깨알 같은 설정도 많다. 극 중 만복의 짝사랑남 효길이 근무하는 중국집의 이름은 '하이루'다. 게다가 만복에게 닥친 위기 때문에 슬픈 BGM이 나와야 할 것 같은 장면에서는 영화 '타이타닉' OST '마이 하트 윌 고 온(My heart will go on)'의 리코더 '삑사리' 버전이 흘러나온다. 가장 슬퍼야할 순간에 배를 잡고 웃게 되는 이유다. 또한 애니메이션 전공인 백승화 감독은 영화 곳곳에 만화적 표현을 배치해, '걷기왕'의 톤을 발랄하고 유쾌하게 꾸몄다.
이렇듯 '걷기왕'은 누군가의 발을 걸거나, 비하하지 않아도 충분히 웃길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마치 친근한 이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내뱉는 농담 같달까. 실없는 이야기의 연속이지만 던지는 메시지는 깊고 묵직하다. 하지만 러닝타임 93분 동안 누구도 상처받거나 마음 상하진 않았다. 민폐 없는 영화 '걷기왕'의 소소한 미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