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 막연한 미래를 꿈꾸는 희망조차 잃었던 이들이 더 나은 인생을 꿈꿔본다. 그 희망은 결국 현실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고, 흘러가던 대로 살던 예전보다 더 큰 고통이 찾아온다. '희망'은 삶을 더 애처롭게 만들 수도 있지만, 절대 잃지 말아야 할 것. 처절한 밑바닥 인생으로부터 그 희망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지난 2월 9일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 더블케이씨어터에서는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에서'(1902)가 무대에 올랐다. 막심 고리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이자 러시아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작가다. 그의 희곡 '밑바닥에서'는 하수구같이 더럽고 어두운 싸구려 여인숙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살아가는 여러 인간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연극 '밑바닥에서'(연출 손효원·김수로/총괄프로듀서 김수로·김민종)는 고전의 무대화에서 관객들이 막연하게 느끼는 '어려운 작품'이라는 인식을 탈피했다. 객석에는 연극을 공부하는 학생들부터 부모님 연령층까지 다양한 관객들이 자리하며 작품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밑바닥에서'의 프로듀서이자 메드베제프 역으로 배우로서 무대에 오르고 있는 김수로는 SNS을 통해 좌석을 가득 메워준 관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고전이 가진 힘 중 하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내용을 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대화되었을 때 메시지 전달에 크게 힘 뺄 필요가 없다. 연극 '밑바닥에서'는 그런 장점을 잘 활용했다. 고전 내용에 충실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재미를 이끌어냈다. 소극장 무대에 오른 16명의 배우는 제각각 캐릭터를 입체적인 인물로 표현했다. 한 명의 배우가 멀티로 뛰는 일 없이, 분량에 구애받지 않고 한 캐릭터에 집중했기 때문에 인물이 가진 개성이 제대로 표현됐다. 그것은 곧 관객의 이해를 돕고 집중도를 높였으며, 인물들의 유기적 관계에 따른 웃음을 선사했다.
다만 16명의 인물이 저마다의 색깔을 관철하다 보니 내용은 풍성했지만, 메시지는 약하게 전달된 면이 없지 않다. 현실에 안주하며 살던 인간들이 희망을 보게 되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려는 노력도 하기 전에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것. 생각보다 어려운 현실의 벽을 실감하는 장면은 먹먹함과 여운을 남겨야 하는데 관객에게 메시지가 전달되고 느낄 시간이 촉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바닥에서'가 주는 메시지는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우선 무대의 소품과 배경부터가 심상치 않다. 거대한 박스들로 메꿔진 벽면은 성냥갑 같은 아파트를 연상시킨다. 아파트가 주는 느낌이 차갑지만 내부적으로는 행복한 가족이 사는 곳의 느낌이라면, 박스로 연상시킨 아파트는 그저 캡슐처럼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공간에 사람들이 쌓여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하게 쌓인 박스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나타냈다면, 규칙 없이 여기저기 놓인 소품들 또한 그들의 복잡한 인생을 드러냈다. 손을 뻗으면 어딘가에 있는 술병, 사다리 대신 양동이 등 정돈되지 않은 환경은 "청소하라"고 아무리 외쳐도 바뀔 수 없는 그들의 삶이다.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은 '밑바닥에서'가 주는 메시지 그 자체가 됐다. 극 초반 폐병을 앓는 안나는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다. 남편인 끌레시치는 병든 안나를 귀찮아하며 빨리 죽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살기 힘든 상황에서 추락하는 인간 생명에 대한 가치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지하실에 입주한 노인 루까로부터 그 의미를 다시 찾는다. 루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친절하다. 그는 어느 사람이건 무시하지 않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지식의 수준이나 가진 것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다. 지하실 식구들은 루까를 금방 받아드리고 좋아하게 된다. 루까는 아픈 안나 곁을 지키며 그의 임종을 지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보였다. 몸 파는 창녀인 나스쨔의 거짓인지 진짜인지 모를 사랑 이야기도 경청한 루까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배우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루까는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도둑 페페르와 탐욕스러운 안주인 바시리사, 그리고 밑바닥 여인숙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순수한 여인 나타샤의 삼각관계는 매번 지하실을 시끄럽게 한다. 페페르와 나타샤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만, 지하실의 주인인 꼬스트일로프에게 폭행을 당해온 나타샤의 인간불신으로 인한 폭주로 혼이 쏙 빠지는 난리통 속에서 루까는 조용히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다. 한바탕 소동을 겪은 후 루까의 부재를 알아차린 지하실 식구들은 아쉬운 마음을 드러낸다. 그 후, 원래 그런 사람은 없던 것 처럼 다시 술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던 그들의 앞에 일어난 일은, 희망을 꿈꿨지만 잡을 수 없었던 배우의 죽음. 배우의 자살 소식에 힘이 쭉 빠진채 고개를 숙인 지하실 식구들의 모습 속은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와 처지를 처절하게 느끼게 한다.
도둑, 창녀, 사기꾼 등 결코 좋지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빈민촌 지하실이지만, 그들은 저마다 사연을 품고 있다. 지하실 식구들 누구와도 허물없었던 루까는 대등한 눈높이와 거대한 포용력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앞날을 생각하는 기회를 심어줬다. 훌륭한 리더가 있었기에 자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품었지만, 루까의 부재로 가야 할 길을 알 수 없게 된 배우는 결국 더 큰 절망에 빠졌다. 지하실 식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다. 자신들을 믿어주고, 한 발 나아갈 수 있다는 용기를 부여하며 길잡이가 되어줄 든든한 리더가 필요했다. 그런 리더의 존재는 곧 희망으로 연결됐다. 제각각의 삶에서 안주한 그들에게 잠시나마 빛이 되었던 루까의 부재는 그런 의미에서 지하실 식구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김수로 사단이라 표현할 수 있는 '밑바닥에서' 연기자는 김수로 프로젝트 작품에 참여했던 배우들이다. 그들은 탁월한 생활 연기력을 선보이며 무대를 완벽한 빈민촌 지하실로 만들었다. 특히 안나 역 배우 윤정은은 한쪽 구석에서 계속 아파하는 모습으로 장시간 누워있으면서 분위기를 만들었다. 전반적으로 가장 오랜 시간 모습을 드러낸 모자장수 부브노프 역 배우 김아영은 작품의 흐름을 밀고 당기면서 실질적으로 극을 진행시키는 역할을 했다.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들 덕분에 웃음 포인트도 제각각이었던 분위기 덕에 배우들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관객 웃음이 터지면 웃음에 전염되어 미소를 머금고 연기를 이어나가는 모습은 소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유대감이었다.
한편 김수로, 강성진 외 다수의 배우가 출연하는 막심 고리키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연극 '밑바닥에서'는 오는 3월 12일까지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 더블케이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사진=더블케이 제공, 본사D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