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 남경주, 최정원, 송일국, 이지하. 말이 필요 없는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연기 내공 갑(甲) 배우들이 펼치는 설전은 마치 블랙홀 같다. 쫀쫀하게 대사를 주고받으며 빈틈없는 공기를 채워가는 네 사람의 연기는 배우와 캐릭터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생생한 현실감을 선사했다.
지난 6월 24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대학살의 신'이 7월 23일 마지막 공연을 펼친다. 알렝 역 남경주-아네트 역 최정원, 미셸 역 송일국-베로니끄 역 이지하, 이 캐스팅 발표만으로도 큰 관심을 받은 이 작품은 제목부터 흥미를 끌었다. '대학살의 신' 영문 제목은 'GOD OF CARNAGE.' '대학살(Carnage)'라는 섬뜩한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연극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학살의 신' 이야기는 알렝-아네트 부부와 미셸-베로니끄 부부의 11살 동갑내기 아들 페르디낭과 브뤼노의 작은 싸움으로부터 시작된다. 두 아이는 놀이터에서 투닥거리다가 싸움을 한다. 브뤼노는 페르디낭에게 맞아 이빨 두 개가 부러지게 되고 이에 네 사람은 한자리에 모인다. 처음에는 교양과 매너로 무장한 채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성숙하게 해결 방법을 찾아가던 두 부부는 결국 유치찬란한 설전을 시작하며 본성과 민낯을 드러내게 된다.
작품 속에서 아이들의 싸움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부부는 본색을 드러냈다. 서로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삿대질은 기본, 물건을 던지고, 욕을 하며 육탄전까지 펼쳤다. 마치 '대학살의 신'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처참한 형국을 맞이한 네 사람은 지성인인 척 가식으로 자신을 포장했던 사람들이 서로 헐뜯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의 제목인 '대학살의 신'은 이러한 인간의 위선을 조롱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이기심, 폭력성과 같은 파괴적인 욕망으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아이들로 시작된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어버렸다. '대학살의 신'은 두 부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그 바탕에 깔린 관계, 소통, 본색, 가식, 본질, 이기심, 사회적 이미지 등 다양한 키워드는 꼭 학부모를 거치거나 그 나잇대의 관객이 아니라더라도 충분히 공감하고 즐길 수 있도록 짜여졌다. 더불어 내 편도 네 편도 없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설전 덕분에 흥미진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작품 속 인물 캐릭터는 실제로 주변에서 찾을 수 있을 법한 인물이라 더욱 공감대를 높였다. 알렝(남경주 분)은 돈과 권력을 밝히는 전형적인 속물 변호사다. 아이들 싸움에는 관심도 없는 그는 휴대폰를 손에서 떼어놓지 못하는 지독한 워커홀릭이다. 알렝의 아내 아네트(최정원 분)는 외적으로 럭셔리하고 교양있는 여성이다. 평범한 주부인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만 받는 남편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상냥하고 고상한 척 자신을 꾸몄지만 술에 취해 불만을 토로하거나 남편의 핸드폰을 꽃병에 처박고, 급기야 꽃병의 백합을 뽑아 던져 집안을 엉망으로 만드는 제멋대로의 파괴의 신이다.
미셸(송일국 분)은 노력하는 공처가이자 엄마에게 착실한 마마보이다.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인 그는 세 사람 사이에서 중재하려 노력하지만 딸의 햄스터를 버린 것에 대해 아네트와 베로니끄가 몰아세우자 결국 울분을 터뜨리며 본성을 드러낸다. 베로니끄(이지하 분)는 아마추어 작가로 자신만의 신념을 지닌 인물이다. 세계의 안녕과 평화를 꿈꾸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타인의 의견을 억누르고 조율하려 하는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다. 똑바른 말만 할 것 같은 그녀였지만 본색이 드러난 베로니끄는 탁자를 밟고 올라가 미셸에게 헤드록을 거는 등 육탄전을 선보여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사실 입장해서 본 공연장 분위기는 특별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이 객석에 앉아 연극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런 환경에 세대가 다른 이들이 과연 하나가 되어 작품에 공감할 수 있을까 우려됐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대학살의 신'은 특정한 나잇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어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민낯 그리고 교양이라는 가면 속에 가려진 인간 근본의 가식, 위선, 허상, 유치함과 치사함을 드러냈다. 두 부부의 에피소드를 보며 폭소하고 있지만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결국 저런 상황 속에 있던 혹은 평소 언젠가의 내 모습인 것이다. 2010년 국내 초연된 연극 '대학살의 신'은 프랑스 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작품이다. 토니 어워즈(최우수 작품상, 연출상, 여우주연상), 올리비에 어워즈(최우수 코미디상) 등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의 상을 거머쥐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대학살의 신'은 한국 초연 당시 대한민국 연극대상(대상, 연출상, 여우주연상)과 동아연극상(여우주연상) 등 국내 권위 있는 연극제 주요부문 상을 모두 휩쓸었다.
짜임새 짙은 이야기 구성과 배우들의 섬세한 심리 표현과 팽팽한 설전은 극을 쫀쫀하게 만들며 재미와 더불어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연극에서 느낄 수 있는 완벽한 카타르시스를 체험할 수 있는 '대학살의 신'은 7월 23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마지막 공연을 펼친다.
(사진 제공=신시컴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