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종효 기자]AJ 스타일스는 가장 큰 무대에서의 패배를 보상받을 수 있을까.
WWE 소속 프로레슬러 AJ 스타일스가 WWE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벨트를 정조준하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앞서 4월 3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알링턴 AT&T 스타디움서 열린 WWE 최대의 쇼 레슬매니아 32에서 열린 AJ 스타일스와 크리스 제리코의 경기. 17분여의 치열한 공방 끝에 크리스 제리코가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린 AJ 스타일스에게 피니셔인 코드 브레이커를 명중시킨 뒤 핀폴에 성공하자 관중은 술렁였다.
TNA와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정복하고 WWE에 데뷔한 ‘경이로운 자’, ‘초특급 이적생’ AJ 스타일스가 WWE의 상징과도 같은 무대에서 패배하는 순간이었다.
승패가 정해져 있는 프로레슬링에서 경기 결과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극성스러울 수 있다. 마니아 팬들은 경기 결과를 ‘프로레슬링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 정도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기는 의미를 부여할 가치가 충분했다. ‘레슬매니아’에서라는 무대에서의 경기, 그리고 경기서 패배한 이가 다른 이도 아닌 AJ 스타일스라는 점에서 말이다.
레슬매니아는 WWE를 대표하는 큰 축제다. 그간 있었던 큰 스토리를 매조지하는 수확철이기도 하며 향후 1년의 계획을 가늠케 하는 행사다. 이 곳에서 챔피언을 획득한 선수는 ‘레슬매니아에서 챔피언에 오른’이라는 수식어를 갖고 활동하며 레슬매니아 연승은 따로 통계를 낼 정도다. 심지어 레슬매니아 이후 예상과는 달리 하락세를 탄 세자로의 경우도 ‘레슬매니아 앙드레 더 자이언트 추모 배틀로열 우승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등 레슬매니아에서의 경기 결과는 일반적인 프로레슬링의 결과와는 무게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신인 프로레슬러들이 링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 갑작스런 푸시(프로레슬링에서 특정 선수를 띄워주기 위해 주요 비중 등을 맡기거나 연승을 하게 만드는 의도적 각본)로 스타 반열에 올라서지만 WWE 팬들이 새로운 얼굴에 무조건 환호하는 것만은 아니다. WWE 팬들은 의외로 기존의 것에 익숙한 성향이 있으며 이는 WWE 회사의 지지를 받는 신인들이 별 반응을 받지 못하고 일순간 추락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 스토리만이 아닌, 경기를 얼마나 재미있게 만드는지도 꼼꼼히 따지는 WWE 팬들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얼굴의 선수가 단숨에 최고의 위치에 서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AJ 스타일스는 팬들을 빨리 흡수할 수 있는 ‘베테랑 신인’이다. WWE에 최근 이적해 팬들에게 얼굴을 드러냈지만 이미 프로레슬링 팬들이라면 AJ 스타일스가 ‘경이로운 자’라는 별명대로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알고 있다. AJ 스타일스는 과거 북미 2위 프로레슬링 단체인 TNA의 스타일을 가장 잘 보여주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군림했으나 TNA의 재정난에 따른 계약상의 마찰로 인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기량은 일본에서도 돋보였다. 일본 최대 단체 신일본 프로레스에서 2회 IWGP 헤비급 챔피언을 획득했고 숱한 명경기를 제조해냈다. 많은 WWE 팬들은 북미와 일본을 막론하고 발군의 활약을 보인 AJ 스타일스가 WWE로 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렇듯 ‘검증된 스타’ AJ 스타일스가 ‘WWE의 상징적인 무대’ 레슬매니아에서 패배한 것은 그의 활약을 기다리는 팬들을 실망시키기 충분했다. 무엇보다 크리스 제리코가 상대의 위상을 높여주고자 자신이 경기에서 패배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성향이라는 것을 잘 아는 WWE 팬들은 크리스 제리코가 강력히 승리를 고집하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함과 동시에 WWE 회사가 AJ 스타일스의 앞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렇듯 AJ 스타일스의 레슬매니아 패배는 많은 걱정거리를 남겼지만 팬들과 ‘밀당’에 있어서 탁월한 WWE는 단 하루 만에 팬들에게 답을 줬다.
레슬매니아 32 다음날인 4월 4일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아메리칸 에어라인즈 센터서 열린 WWE RAW 생방송서 AJ 스타일스는 WWE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도전자 결정전 경기 승리를 거둬 단숨에 메인 이벤터 라인으로 진입했다.
PPV(페이퍼뷰)가 끝난 다음 날의 WWE RAW는 여느 때의 WWE RAW보다 흥미로운 사건이 많이 발생한다. 특히 레슬매니아 다음 날의 WWE RAW는 1년을 새로 시작하는 쇼로 여겨지고 때로는 레슬매니아보다 더 재미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WWE에서도 공들여 시나리오를 준비한다.
이날 역시 WWE는 새 WWE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로먼 레인즈에게 도전할 이를 선발하면서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일일 단장이 된 셰인 맥맨은 링 위에서 한바탕 다툼을 벌인 크리스 제리코, AJ 스타일스, 케빈 오웬스, 새미 제인 등 4명이 한 번에 링 위에서 맞붙어 WWE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도전자 결정전을 벌일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경기 전 케빈 오웬스의 습격을 받은 새미 제인은 해당 경기에 참가할 수 없게 됐고 새미 제인의 빈 자리는 오랜만에 돌아온, ‘믿고 보는 경기력의 소유자’ 세자로가 대신하게 됐다.
세자로, AJ 스타일스, 케빈 오웬스, 크리스 제리코. 모든 선수들이 출중한 기량을 자랑하는 이 4자간 경기는 그 조합만으로도 환상적이었다. 4명은 쉴틈 없는 기술 쇼를 펼쳤고 예상치 못한 반격과 조합 공격으로 관중의 ‘디스 이즈 어썸!(엄청나!)’이란 구호를 이끌어냈다. 그만큼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좋은 경기였다. 눈 뗄 수 없는 혼전 속에 결국 AJ 스타일스는 경기 막판 크리스 제리코에게 스타일스 클래쉬를 작렬한 뒤 WWE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에 대한 제1 도전자 자격을 얻었다.
당장 AJ 스타일스와 로먼 레인즈의 1대1 대결이 벌어질 지, 새로운 도전자 선정이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AJ 스타일스는 이 경기에서 승리를 거둬 단숨에 WWE 월드 헤비웨이트 타이틀을 노리는 메인 이벤터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레슬매니아에서 크리스 제리코에게 당한 패배의 아픔도 일정 부분 설욕하게 됐다. AJ 스타일스 정도의 이름값을 가진 선수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WWE 메인 이벤터 대열에 합류하게 되면 늘 챔피언을 위협하는 역할 등을 병행하면서 오래 잔류하게 된다.
앞서 이날 WWE RAW에서 AJ 스타일스는 “레슬매니아 경기에서 패배한 뒤 사라지려 WWE로 이적한 게 아니다”며 전날 레슬매니아에서의 패배를 언급했다. 이는 바꿔 말해 레슬매니아 단 한 경기의 승리를 위해 WWE에 온 것이 아니라는 뜻, 큰 그림을 그렸다는 뜻도 된다.
레슬매니아 32에서 로먼 레인즈가 트리플 H를 꺾고 새로운 WWE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오른 것은 비로소 ‘로먼 엠파이어’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WWE가 로먼 레인즈를 향후 1년간 WWE를 이끌 새 얼굴로 지목했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단 하루 만에 WWE는 로먼 레인즈를 위협할만한 강력한 도전자, AJ 스타일스를 소개했다. AJ 스타일스는 현재 로먼 레인즈와는 달리 경기 운영력, 기술, 팬들의 열렬한 지지 등을 모두 지니고 있다.
AJ 스타일스의 말대로 그는 WWE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올라 ‘로먼 엠파이어’를 끝내고 ‘경이로운 시대’를 열 준비가 돼 있다. ‘준비가 덜 됐으나 왕좌에 오른’ 로먼 레인즈, ‘늘 날아올랐으나 WWE에서만 기회가 없었던’ AJ 스타일스가 맞붙을 준비를 마쳤다. 이로써 WWE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디비전은 점점 더 흥미진진하게 됐다. 시간이 조금 걸릴지언정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