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주 기자] 태초의 순간을 상상하듯 몽환적 리듬(‘고결한 충돌’)을 지나면 형식적 결혼을 일갈하고(‘Let us love’) 거친 호흡법으로 완성한 플로우(‘거울안의 그녀’)로 현실을 풀어낸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랩으로 문제를 향해 걸어가더니(‘알고 싶지 않아’) 혼돈 끝을 지나 환희(‘충돌완화’)를 들려준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지나칠 트랙이 없다. 랩과 랩 사이, 트랙과 트랙 사이가 견고하다. 오직 앨범에서만 공개된 두 개의 스킷(Skit)은 친절한 덤이다. 바로 래퍼 JJK(본명 고정현·30)의 정규 앨범 ‘고결한 충돌’이다.
‘고결한 충돌’은 우리나라 힙합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수작이다. 지난 2013년 5월 결혼부터, 임신, 출산, 현재의 육아까지 오밀조밀하게 담았다. 그것도 남자 래퍼가 말이다. 시간의 흔적을 래핑한 시간만 해도 1년 6개월이다. 몇 주가 멀다 하고 찍어내는 싱글 시장에서 9트랙을 채운 정규 앨범을 고집했다. 벌써 7장째다. 트랙마다 완성도가 높아 싱글로 여러 번 쪼개 낼 법도 하건만 한 장으로 묶었다. 물론 예전에 색다른 경험을 쌓기 위해 싱글 ‘360도’나 ‘땡큐 써머(THANK YOU, SUMMER)’를 발표하기도 했다.
“‘고결한 충돌’은 하나의 흐름이 정해져 있다 보니 부분적으로 공개하면 감상에 해를 가할 것 같더라고요. 사랑, 결혼, 육아라는 비교적 밝은 소재인데도 무게감을 갖고 가려다 보니 암울한 분위기가 나네요(웃음). 다음 앨범에는 작업 시간도 줄이고 메시지도 가볍게 접근해보고 싶어요.”
가족의 탄생을 노래한 이번 앨범을 관통하는 단어는 ‘충돌’이다. JJK에게 결혼과 출산은 서로 다르게 살아온 거대한 두 존재가 만나 부딪치는 것처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주 빅뱅을 암시하듯 추상적 디자인과 다양한 색깔이 담긴 앨범 커버 이미지도 그런 의미가 숨겨져 있다.
“우주가 탄생할 때 느낌을 커버에 실어봤어요. 제겐 가족의 탄생이 거대한 충돌처럼 다가왔거든요. 그 충돌이라는 게 결국은 긍정적 의미인거죠. 전 이 과정을 통해서 고결한 무언가를 얻었습니다.”
JJK에게 우주의 충돌처럼 내려온 아들 결(2). 국내 힙합계에서 한 여자와 한 아이를 위해 9트랙을 풀어낸 이는 JJK가 최초다. 핵가족화의 결정체인 1인 가구가 늘어가는 요즘 JJK가 던지는 메시지는 가족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창작을 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작품에 자기 자신을 투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삶의 그래프가 앨범을 통해 그려지고 있는 것이죠. ‘고결한 충돌’은 스물여덟 결혼했을 당시의 제 모습을 투영한 거예요. 이번 앨범은 가치 있는 힙합 앨범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가족에 대해 이렇게 솔직하게 랩으로 풀어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힙합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주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힙합답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힙합도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을 제가 입증했으면 좋겠네요.”
‘10년차’인 JJK의 랩은 단단하다. 언더그라운드에서 밑바닥부터 닦았기에 흔들림이 없다. 중학생 시절 미국 유학 생활을 할 때 향수를 달래기 위해 접했던 한국힙합 앨범이 JJK의 인생을 흔들었다. “타지에서 늘 홀로 다녔는데 랩이 없었다면 마음을 닫았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일기장에 하루를 남기듯 랩으로 인생을 써내려갔다. 그러다 17세 때부터 한국으로 넘어와 힙합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현재 소울다이브, 올티, 루피 등이 소속된 ADV 크루로도 활동 중이다. ADV 크루 소속 멤버들 중 올티는 지난해 Mnet 힙합 서바이벌 ‘쇼미더머니3’에 출연해 화제를 모은 유명 인물이다. 말 재주가 좋고 프리스타일 랩에 능한 JJK도 올티처럼 방송판에 나갔으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JJK는 “싸이퍼처럼 길거리 공연이 더 좋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방송은 저랑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매스컴에 대한 반감이 있는 건 아니에요. 올티가 ‘쇼미더머니3’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저도 적극 추천했어요. ‘쇼미더머니’가 방송되는 시점에 전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5개 도시에서 길거리 공연을 했어요. 사람들의 표정과 에너지가 참 좋았어요. 제 랩이 그들에게 어떻게 꽂히는지 보는 재미가 정말 짜릿합니다.”
길거리 공연은 수익성이 크지 않다. JJK는 소위 ‘돈 안 되는’ 프로젝트임에도 지속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올해도 전국 순회 길거리 공연을 연다. “10년이나 힙합을 했으면 좀 더 편안한 무대를 꿈꾸기 마련인데 왜 길거리를 택했냐”고 묻자 “즐거워서다”라고 현답을 들려줬다. JJK는 “지금의 아내도 길거리 랩 공연 덕분에 만난 인연”이라고 했다.
“제가 돈도 안 되는 길거리에서 랩을 하니 어떤 분들은 ‘힙합 문화 지킴이다’ 하시는데 그런 건 아니에요(웃음). 단지 제가 행복하고 즐겁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힙합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무대인 것 같아요. 매일 월급이 보장되는 안정된 삶을 살았다면 지금까지 랩을 하고 있었을까요. 돈에 휘둘리지 않았기에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었어요. 길거리 공연은 제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돈의 양이 행복을 결정하는 건 아니니까요.”
음악을 통한 감성을 공유하고 싶어서 지난달 17일 사전 음감회도 열었다. JJK는 “이번 앨범은 음감회에 어울리는 콘텐츠였다”라며 “음원과 앨범 판매를 통한 숫자로만 이뤄진 반응이 아닌 음악에 반응하는 생생한 표정을 접해 행복했다”라고 말했다.
힙합이 대세가 된 요즘 음악 시장에 돈과 명예를 쫓아간 래퍼들. 사랑 타령으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변질된 랩들. 이에 대해 JJK는 “지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자연재해 같은 것”이라며 “저처럼 언더그라운드에서 랩을 하던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걷느냐에 따라 균형감 있는 힙합 시장의 성장이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몇 차례 언더그라운드 레이블에 소속됐던 그는 얼라이브에 둥지를 틀었다. 음감회를 열었듯 색다른 행보를 예고했다. “한국인의 정서를 노래하는 래퍼가 되겠다”며 특유의 스타카토 기법으로 끊어서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고결한 충돌’에서 들려준 날카로운 랩처럼 날아와 강렬하게 꽂혔다. 김은주 기자

